천일의앤

2018. 6. 3. 08:19음악Music

Anne Of The Thousand Days
영화 [천일의 앤]의 테마
음악 : Georges Deleure

감독 : 찰스 재롯

출연 : 리차드 버튼(헨리 8세),쥬느비에브 뷰졸드(앤 볼린)

음악 : Georges Deleure(죠르주 들뤠르)/



[가져온 글]







 

 

 

16세기의 영국 튜더 왕조의 국왕인 헨리 8세(King Henry VIII: 리차드 버튼 분)는 자신의 왕후인 앤 볼린(Anne Boleyn: 제네비에브 부졸드 분)을 처형하기위해 재상 크롬웰(Thomas Cromwell: 존 콜리코스 분)이 가지고 문서에 서명을 하려고 한다.

영화는 서명을 하려는 헨리 8세가 자신이 앤과 결혼하기 위해 해왔던 일들을 회상하는데서 전개된다. 왕의 무도회. 프랑스에서 이제 막 돌아온 볼린가의 막내딸인 앤도 약혼자인 퍼쉬(Harry Percy: 테렌스 윌톤 분)와 무도회에 참석했다.

울지 추기경(Cardinal Wolsey: 안소니 쿼일 분)은 이 젊은 남녀의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지만 아름다운 앤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겨 버린 왕은 허락은 커녕 앤과 퍼쉬를 떨어뜨려 놓고 자신이 앤을 차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앤은 이미 왕에게 농락당해 아이를 가지고 있던 언니(Mary Boleyn: 발레리 거론 분)의 모습을 보곤 절대 왕의 여자가 되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까지 말하고 왕에게도 냉랭한 태도를 갖는다. 앤의 이런 싸늘한 태도에 왕은 더욱더 매력을 느끼고 앤의 집에 머물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다.

결국 앤의 안위를 걱정한 퍼쉬는 다른 아가씨와 결혼을 하고 앤은 괴로워한다. 앤의 계속되는 냉담한 반응에 왕은 캐서린 왕비의 시종으로 앤을 궁궐로 불러들이고 궁으로 옮긴 앤은 점점 권력과 사치의 맛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왕의 애타는 사랑은 여전히 앤을 떠나지 않는다. 권력의 맛을 느끼게 된 앤은 왕에게 자신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주는 대신 자신이 영국의 왕비이어야 하며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앤과 결혼하기 위해선 우선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스페인의 세도하에 있던 교황청이 헨리 8세와 스페인 출신 왕비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아이렌 파파스 분)의 이혼을 허락할 리가 없다.

결국 앤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교황청을 무시하고 자신을 수장으로 한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밖에 없다. 헨리 8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숙청하고 앤과 결혼한다.

하지만 앤과 왕의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앤이 원하지 않는 딸을 낳은 데다 앤의 딸 엘리자베스(Baby Elizabeth: 아만다 제인 스미시 분)의 왕위계승권으로 인해 다른 많은 부하들이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앤과의 이혼을 바라는 헨리 8세는 크롬웰을 시켜 앤을 간통죄로 끌어넣는다. 그들의 음모로 런던탑에 갇히게 된 앤은 크롬웰의 주재로 재판을 받고 무죄를 인정받지만 여전히 헨리 8세와의 이혼을 거부하고 딸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다.

또 다른 여인에게 맘을 빼앗기고 있던 헨리 8세는 결국 앤을 참수형에 처하게 하고, 앤은 후에 여왕이 된 딸 엘리자베스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문화산책] 천일의 앤과 장희빈

앤·장희빈 당당한 현대여성상 반영
희빈의 초라한 최후 앤과 대비돼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로망이 하나 있다. 과거로 돌아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대상을 고르려고 하면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한 일생을 보낸 왕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양은 영국의 헨리 8세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나은 편이고 조선시대 임금들 중에는 세종이나 숙종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따지고 보면 이들의 삶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특히 헨리 8세와 숙종은 자신의 왕비를 죽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근대 영국을 건설한 헨리 8세는 6명의 왕비를 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두고 부러워할 남자들이 있겠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두 명이 처형당했고 두 명이 이혼당했으며 한 명은 사별했다. 이 중에서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은 두 번째 왕비인 앤 볼린이다. 1969년 만들어진 ‘천일의 앤’은 앤과 헨리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대역죄로 머리가 잘리는 비극적 결말을 다룬 작품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 리처드 버튼과 주느비에브 부졸드가 열연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10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나 막상 시대극 의상 부문에서만 상을 받는 데 그쳤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기억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천일의 앤’에서 주목할 부분은 주인공 앤의 캐릭터이다. 당당하고 기품이 있으며 그 누구 앞에서도 할 말을 다하는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이다. 프리섹스를 주장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부와 명예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열정을 가졌지만, 자신의 자녀를 사생아로 만들 수 없다며 왕비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왕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합리적 계산을 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또한 여자도 얼마든지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 속 캐릭터가 얼마나 역사적 현실에 부합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앤이 파리와 비엔나의 궁정에서 스무 살 전후의 시절을 보내면서 선진 르네상스의 문물에 흠뻑 젖었다고는 하나 16세기의 여자가 프리섹스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감이 없다. 결국 앤의 영화 속 캐릭터는 20세기의 창조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영화가 아무리 400년 전 인물을 그리고 있더라도 그 캐릭터에 투영된 것은 괄목할 만큼 신장된 20세기 서구의 여권(女權)인 것이다.

한국사에서 앤 볼린에 필적하는 인물은 장희빈인 것 같다. 극적으로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 정쟁의 희생이 된 면에서 그러하다. 요즘 그녀는 드라마 ‘동이’에서 되살아났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주인공 동이와 대립하고 갈등하는 상대역할을 맡은 덕분에 과거부터 이어오는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당당하고 야무진 이미지는 ‘천일의 앤’이 만들어낸 앤의 이미지와 흡사했다.

‘천일의 앤’에서 앤은 왕의 이혼요구를 수락하면 수녀원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것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혼하면 딸인 엘리자베스가 사생아가 되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왕이 되어 영국을 대제국으로 이끄는 날을 상상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동이’에서 희빈은 자신의 아들이 세자의 지위를 확실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모하다가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비극을 자초한다. 그리고는 동이 앞에 쓰러져 아들의 장래를 구걸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서 죽음 앞에 당당한 앤과 초라한 희빈의 이미지가 비교된다. ‘동이’ 속 희빈의 당당한 이미지가 개선된 우리 여성의 지위를 말한다면 초라한 최후는 무엇인가. 절반의 완성이며 우리가 앞으로 남은 동이의 활약을 기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세계일보에서 전재함
[가져온 글]

천일의 앤과 헨리 8세 vs 장희빈과 숙종

| 악동의 팡세
헤렘 | 2016.07.30. 16:53


백년 전쟁(1337-1453)이 끝난 뒤, 영국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30년간의 장미전쟁(1455-1485)일어났습니다.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의 전쟁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경쟁이었습니다. 이 전쟁 동안 양 가문 및 그들에게 합류한 귀족들은 자신들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략결혼을 통해 장미전쟁을 수습한 헨리 7세가 전쟁-승리-종주국의 왕녀와 결혼의 형식으로 영국의 국민 국가로서의 기반을 세웁니다.

요크파가 흰 장미, 랭카스터 파는 붉은 장미가 문양이었는데 랭카스터가의 헨리 튜터(헨리7세)가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왕위에 즉위하였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의 왕녀와 혼인합니다.

헨리8세는 잉글랜드 역사상 야사나 가십으로도 끊임없이 떡밥을 생산하고 있는 흥미로운 군주입니다. 그는 헨리 7세의 차남이자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간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로 우리나라 숙종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는 장미전쟁으로 절멸한 랭카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습니다. 앤 불린과의 결혼에서 비롯된 갈등 등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함으로서, 이후 영국은 물론 유럽 기독교권의 판도 자체에도 무시 못할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종교개혁 때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손수 작성하기도 하는 등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양다리를 모두 걸친 왕입니다.

왕세자였던 아서 튜더에게 스페인에서 시집온 ‘아라곤의 캐서린(부인)“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정치외교적인 연합을 위해서 결혼시킨 것인데, 아서 튜더는 일찍이 알 수 없는 병 (아마도 결핵)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둘째아들 요크공과 캐서린을 결혼시키는데 요크 공이 바로 후의 헨리8세입니다.

예전에는 숙 종이 여성과 서,남인세력에 휘둘린 우유부단한 인물로 평가된 반면에, 최근에는 서인의 세력이 너무 세다 싶으면 남인으로 갈아엎고 동시에 장희빈을 중전자리에 앉혔다가, 남인이 너무 나대면 인현황후를 앉혀서 서인을 등용한 카리스마 있는 군주, 붕당정치의 대가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헨리 8세는 쾌락과 남성적인 본능에 굉장히 충실했습니다.

(헨리 8세의 여섯 부인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평화로운 결혼생활은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이 몇번의 유산과 사산 끝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메리를 얻게 되자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헨리 8세는 왕위계승권을 확실히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습니다. 캐서린이 40세에 이르고 폐경에 가까워지자 헨리 8세는 점점 더욱 초조해집니다. 헨리8세는 처음에는 자신이 불임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는데 그의 정부 엘리자베스 블런트에게서 태어난 건강한 아들을 보고 캐서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하나밖에 없는 딸 메리는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런트 말고도 헨리에게는 또 다른 정부가 있었는데 메리 불린이라는 조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일찍이 그의 사랑을 받고 정부가 되었지만 버림받고 하위귀족과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녀의 언니가 바로 앤 불린, 천일의 앤이라고도 불리는 두 번 째 왕비입니다. 앤 불린은 원래, 프랑스로 시집간 헨리 8세의 누이 메리 튜더의 시녀입니다.

당시 문화적으로 수준 높았던 프랑스 궁정에서 수업 받았고, 세련된 기품과 화술 그리고 총명하고 위트 있는 성격, 그리고 음악과 춤에 능숙하여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앤은 혼담을 위해서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왔다가, 노섬브리아 공작의 후계자인 퍼시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했는데, 이 무렵 헨리 8세가 앤 불린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무렵은 첫 번 째 왕비 캐서린의 시녀 시절이었습니다.

앤과 퍼시의 혼담이 오고가자, 그녀를 흠모하던 헨리는 울시 추기경을 시켜서 결혼을 반대했고 결국 퍼시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앤은 굉장히 슬퍼했다고 합니다. 퍼시와 헤어진 앤은 헨리 8세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헨리 8세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칩니다. 아무도 자신의 구애에 노라고 한 사람이 없었는데 앤은 매몰차게 거절했기 때문이죠. 앤은 동생 메리처럼 정부로 살다가 버림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튕기는 여자에게 매력이 있는 법, 헨리 8세는 오히려 더욱 앤 불린에게 집착합니다. 아마도 이런 심정이었을까요?

"날 거절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나랑 결혼하자!" 헨리 8세는 그래도 몇 개월 유혹하면 앤 불린이 넘어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앤 불린은 퍼시에 대한 사랑과 정부가 될 수 없다는 일념 하에 오랜 시간 헨리를 거절합니다. 한편 어떻게든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꼭 갖고 싶었던 따라서 헨리로서는 자신이 적자를 낳아 적법하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만이 장미전쟁 같은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을 막고 튜더 왕가를 안정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헨리 8세는 마침 애첩인 앤 불린을 좋아하고, 당시 캐서린은 아이를 낳기엔 힘든 나이였으며 무엇보다 폐경기가 와버려서 이혼하려고 한 건데, 당연히 당시 교황이던 클레멘스 7세는 교회법에 따라 이혼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하필이면 당시 유럽 최강국이던 신성 로마제국-스페인 왕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이모가 캐서린이었던 탓에 이혼을 허락한다면 제 2의 로마 약탈이라는 것을 재현할 수 있었기에 당연히 카를 5세의 눈치를 봐야했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해야 하므로 허락할리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뤄지지 않을 거 같아, 결국 수가 틀렸음을 절감하고 결단을 내립니다. 성질머리 같아서야 아주 영국군을 대륙으로 보내 카를과 맞장이라도 뜨고 싶은 심경이었겠지만 워낙에 상대가 거대해서 결국 교황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아예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해 성공회를 만들고 스스로 교회의 우두머리가 된 것입니다. 당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를 파문해버립니다.

물론 헨리 8세가 오로지 이혼허락 안 해주는 교황이 싫어서 수장령을 선포했다고 하면 너무 과하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상당하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해피 엔딩이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실은 이게 바로 그의 가정사가 꼬이는 첫 스텝이었습니다. 수장령 선포와 이혼 과정에서 자파 세력으로 채운 의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의회 조칙을 통해 왕족의 신분 및 국가 중대사까지 결정하게 되면서 의회의 권한이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토머스 크롬웰 등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대신한 총신들의 모략으로 의회가 왕의 거수기 노릇을 했기에 왕권이 강했으나 나중에는 이것이 왕권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한국으로 치면 어쩐지 조선의 숙종과 이미지가 겹치는 인물. 심지어 간신히 얻은 아들이 워낙 병약해서 왕위에 앉은 지 오래 못 가서 사망한 것까지 비슷합니다. 그리고 시녀 출신의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이 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것까지.